지식(주일예배)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벧후1:5)
믿음에 덕을 더하라는 것은 약속을 받은 자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덕을 더하라는 말은 공허한 말장난 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탁월한 믿음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은 믿음 밖에 없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이 믿음밖에 없다는 것과 같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3:12)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대체할 것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의 행위, 행동이 올바르다면 그리스도를 의지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기준에 미달(?)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기준에 미달되는 것이 한 번도 없어야 되는데 한 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실격이다.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없다.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 이 말은 항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믿음에 덕을 더하며 지식을 더하라고 권면한다.
지식이라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지식은 믿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아는 것이 많다는 것은 모르는 것 보다 좋은 것이다. 하지만, 아는 것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 때가 있다.
아는 만큼 행동하지 않거나, 아는 것과 반대로 행동할 때이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마23:1-3)
예수님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율법지식은 인정하였지만, 그들의 행동은 인정할 수 없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과 반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눅12:47,48)
하나님은 알고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모르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모르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알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은 우리가 알아야 한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기본적인 것은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무조건 믿습니다라고 말하는 자들이 아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3:15)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킨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였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8-12)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지식은 세상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믿음이라는 것은 나의 생각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는 것이며 나의 생각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은 우리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3:14-17)
이것은 신구약 성경이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다.
성경의 내용을 알라고 말을 하고 있다.
여호수아서에도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있는 내용이 나온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7-9)
율법책을 항상 가까이 두고 묵상하며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말을 한다.
알다시피 성경 말씀은 우리가 저절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것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물론 말씀을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다르다. 하지만, 아는 것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객관성을 잃고 말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성령의 역사도 성경 말씀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에는 성령께서 말씀을 깨닫는데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되이 대하는 자들에게 말씀을 알게 하셨다.
또한 지식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기 위함이며 하나님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를 알게 하기 위함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9:10)
지혜와 지식은 시작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끝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
우리가 얻고자 하는 지식은 인간에 관련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된 지식이다. 하나님과 관련된 지식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게 한다.
그래서 지식은 알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나아가게 된다.
예수님과 만난 부자청년은 그것의 좋은 예이다.
막10:17(마 19:16-30; 눅 18:18-30)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누가복음에서는 관원이라고 소개되는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보자마다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하여 물었다.
그는 예수님을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지만 완전하지는 못하였다. 단지 뛰어난 랍비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눅24:18-20)
예수님의 제자들이었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예수님을 오랫동안 보아왔지만, 그저 유명한 선지자 정도로 알았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정도로만 안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힘들어 질 것이며, 우리의 종교는 다른 종교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으로 사람들은 여기고 있지만, 우리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다.
예수님은 그 부자청년에게 선한이는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것은 곧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은 선한이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19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20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그 부자 청년에게 계명을 지키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청년이 누누이 들어서 알고 있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그는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바울도 이렇게 고백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빌3:6)
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예수님은 그에게 하나를 가르쳐 주셨다. 율법의 기본 정신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예수님은 그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하나 제시하셨다. 그것은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청년에게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 청년은 그 순간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았으나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
우리는 단순히 말씀에 대한 지식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지식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성경은 영생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1)
생명을 얻는 것과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은 동일한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아야 하는 기본적인 것은 무엇인가?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 구세주이다.
또 하나는 우리가 예배 때 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이다.
이것들은 성경이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과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본을 이루어주는 지식들이다.
결론적으로
믿음에 덕을 더하여야 하며 덕에 지식을 더하여야 한다.
믿음에 덕을 더하는 것은 탁월한 믿음이 되게 만드는 것이며 지식을 더한 다는 것은 믿음에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감정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성경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또한 사도신경으로 그 말씀의 기본에 대하여 우리에게 알게 하셨다.
기본이 중요한 것은 기본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바울의 목표를 공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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